좋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하나로 묶어보면, 저는 1995년 『에반게리온』에서 2026년 한국 웹소설까지의 30년을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바뀐 역사”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의외로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이 세계는 대체 무엇인가?” →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이 세계를 어떻게 플레이할 것인가?” → “이번에는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이게 우리가 지금까지 따라온 전체 흐름입니다.


Ⅰ. 1995년: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에반게리온』

『에반게리온』의 출발점은 불안입니다.

세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NERV가 뭘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신지는 자기 자신이 왜 이 모양인지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그래서 에바에서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가 똑같은 형태를 취합니다.

세계도 수수께끼고, 인간도 수수께끼입니다.

AT 필드는 그 둘을 연결하는 가장 아름다운 장치입니다.

겉으로 보면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의 방어막인데, 결국은

“나와 너를 나누는 마음의 벽”

이 됩니다.

인류보완계획 역시 SF 설정처럼 보이다가 마지막에는

타인이 있기 때문에 상처받는다.
그렇다면 타인과 나의 경계를 없애버리면 되지 않을까?

라는 심리 문제로 변합니다.

즉 설정이 인간의 내면을 물질화합니다.

이것이 이후 30년 동안 엄청나게 반복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에바는 답을 충분히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팬이 작품 밖에서 들어옵니다.

“아담이 뭐냐?”
“릴리스는?”
“보완계획은?”
“이 장면의 의미가 뭐냐?”

시청자가 작품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용기사07이 『쓰르라미』를 설명하면서 자신도 에바를 보며 친구들과 “마르두크 기관이 무엇인가”, “인류보완계획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토론했던 경험이 즐거웠다고 직접 회고합니다. 즉 에바가 만들어낸 ‘작품을 본 뒤 팬들이 함께 해석하는 놀이’는 실제로 다음 세대 창작자에게 이어졌습니다. [출처]

그래서 이 시대의 관계를 한 줄로 쓰면 이렇습니다.

세계 → 인간을 압도한다.
독자 → 세계를 해석한다.

Ⅱ. 1996~2000년: 세계는 반복하면 이해할 수 있다 — 비주얼노벨

그런데 거의 동시에 게임에서는 아주 다른 해법이 발전합니다.
『YU-NO』, Leaf의 『雫』『痕』, 그리고 『ONE』『Kanon』『AIR』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여기서 엄청난 발명이 나옵니다.

“한 번의 이야기로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

A 루트에서는 A의 진실을 압니다.
B 루트에서는 다른 진실을 압니다.
Bad End도 봅니다.
다시 합니다.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능성을 경험한 플레이어만 전체 그림을 알게 됩니다.

Leaf의 『雫』『痕』은 실제로 여러 엔딩과 반복 플레이를 통해 사건 전체를 파악하도록 만들었고, 이후 ‘비주얼노벨’이라는 형식 자체가 확립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출처]

여기서 서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에바에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가 문제였다면,

VN은 게임 시스템 자체로 대답합니다.

“그러면 다시 해보자.”

SAVE.
LOAD.
다른 선택.
다른 루트.
True End.

그러니까 게임이라는 매체가 인간관계에 하나의 불가능한 능력을 부여합니다.

타인을 이해할 때까지 반복할 수 있습니다.


Ⅲ. 그리고 ‘공략’이 ‘구원’으로 변합니다

초기 미소녀 게임에서 욕망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이 여자와 사귀고 싶다.”

그런데 『ONE』과 Key를 거치면서 점점 바뀝니다.

처음에는 귀여운 캐릭터입니다.
같이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농담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이 생깁니다.
과거가 밝혀집니다.
상처가 나옵니다.
상실이 나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욕망이 바뀝니다.

“이 아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 순간 히로인은 단순한 연애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타자’이자 ‘구해야 할 사람’이 됩니다.

에바의 질문에 VN은 아주 낭만적인 판타지로 답한 셈입니다.

에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VN: 그 사람의 루트를 끝까지 따라가면 가능하다.

Ⅳ. 2000~2004년: 나스 키노코 — “이해했으면 이제 선택하라”

그리고 여기서 나스가 등장합니다.
이 부분은 직접 연결고리도 확인됩니다.

나스는 PS판 『ONE』의 전면 텍스트 형식을 보고 “소설의 한 페이지와 같다”고 느꼈고, 자신이 쓰고 싶었던 장문의 전기물을 사운드노벨 형태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것이 『월희』가 노벨 형식을 취하는 직접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출처]

그런데 나스는 Key식 구원에서 한 단계 더 나갑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세계를 먼저 복잡하게 만듭니다.
진조.
사도.
직사의 마안.
영령.
성배.
고유결계.
마법.
근원.

그리고 규칙을 설명합니다.
그다음 그 규칙과 인간의 감정을 충돌시킵니다.
그러고 묻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치자. 그래서 너는 무엇을 선택할 건데?”

여기서 나스 문법이 완성됩니다.


Ⅴ. 능력은 인간의 내면이고, 전투는 철학적 논쟁이 됩니다

시키가 죽음을 보는 것은 단순한 특수능력이 아닙니다.
그는 세계를 죽을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인간입니다.

시로의 무한의 검제도 단순히 검을 많이 만드는 능력이 아닙니다.
남의 이상을 복제해서 살아온 사람 자체가

무한히 복제된 검의 세계

가 됩니다.

그래서 나스에게 가장 좋은 전투는

누가 공격력이 더 높은가

가 아닙니다.

시로와 아처처럼

“너의 삶은 틀렸다.”
“틀릴 수도 있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리지 않았다.”

라는 논쟁을 실제 전투로 만듭니다.

즉

심리 → 설정 → 능력 → 전투 → 철학 → 선택

이 하나의 사슬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줄로 압축합니다.

“좋아하니까, 마시지 않아.”
“답은 얻었다.”
“사물을 죽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나스 명대사가 강한 겁니다.
문장이 특별해서만이 아니라 30시간짜리 서사가 한 문장 뒤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Ⅵ. 2002~2011년: 플레이어가 작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쓰르라미』에서는 게임 선택지를 거의 없애버립니다.
그런데 용기사07은 오히려 독자들이 서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고 논쟁하는 것을 새로운 게임성으로 봅니다.

실제로 그는 『쓰르라미』와 에바의 팬 토론 경험을 직접 연결해 설명했습니다. [출처]

그리고 『우미네코』에서는 더 갑니다.

이제 독자가 작품을 어떻게 읽느냐 자체가 이야기의 주제가 됩니다.

진실을 맞히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논리만으로 사건을 해체하면 정말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가?

작가와 독자의 싸움 자체를 작품 안에 넣습니다. 용기사07 역시 『우미네코』에서는 『쓰르라미』처럼 마지막에 모든 답을 열어 보여주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출처]

그러다 『슈타인즈 게이트』, 『마도카☆마기카』로 넘어가면 더 재미있어집니다.
예전에는 플레이어만 Bad End를 기억했습니다.

이제 캐릭터가 기억합니다.
오카베가 기억합니다.
호무라가 기억합니다.

그리고 『Re:제로』에서는 스바루가 직접 SAVE/LOAD를 당합니다.

즉,

플레이어의 경험이 캐릭터의 경험으로 변합니다.

Ⅶ. 여기서 ‘루프’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처음의 SAVE/LOAD는 편리한 기능이었습니다.
죽으면 다시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걸 인간이 실제로 겪으면?

죽음의 고통을 기억합니다.
사랑했던 사람은 다음 세계에서 자기를 모릅니다.
지난 세계에서 쌓았던 관계가 사라집니다.
나만 압니다.

그러니까

게임적 특권이 심리적 고문으로 변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진화입니다.
게임 인터페이스가 서사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Ⅷ. 동시에 『하루히』『이야기 시리즈』에서는 “우리도 장르를 안다”가 됩니다

또 다른 방향의 변화입니다.

에바 시절 주인공은 세계의 장르를 모릅니다.
신지는 사도가 뭔지 모릅니다.
시키도 진조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키ョン은 다릅니다.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

무슨 개념인지 이미 압니다.
독자도 압니다.

즉 작가와 등장인물과 독자가 장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이야기 시리즈』에 가면 이것을 대놓고 가지고 놉니다.
츤데레라는 것을 압니다.
로리라는 것도 압니다.
위원장 캐릭터라는 것도 압니다.

클리셰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이게 클리셰인 거 알죠? 그럼 이제 이것을 가지고 놀겠습니다.”

가 됩니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더 이상 세계에 놀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장르를 논평하는 사람이 됩니다.


Ⅸ. 2000년대 말: 세계가 ‘이야기’에서 ‘시스템’으로 바뀝니다

『SAO』 같은 게임소설로 가면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예전 판타지는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고,
길드가 있고,
직업이 있고,
괴물이 있고….

이제는 한마디면 됩니다.

“MMORPG입니다.”

독자가 나머지를 압니다.

레벨.
스킬.
HP.
파티.
레이드.
보스.
인벤토리.
퀘스트.

이 단어들이 이미 공용어가 됩니다.

그러니까 세계관을 새로 만드는 비용이 엄청나게 낮아집니다.
여기서 장르소설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Ⅹ. 그리고 한국에 오면 ‘시스템’이 생산성의 언어가 됩니다

여기서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일본 VN에서 게임적 상상력의 중심은 자주

분기와 가능성

이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루트로 갈까?

한국의 MMORPG적 상상력에서는 상대적으로

성장과 축적

이 강합니다.

레벨을 올립니다.
아이템을 얻습니다.
스탯을 올립니다.
돈을 법니다.
더 좋은 장비를 삽니다.
더 강한 사냥터로 갑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가능성의 나무

에서

성장의 계단

으로 바뀝니다.

한국 웹소설 연구에서도 회귀·빙의·환생과 ‘시스템’이 결합해 장르의 강력한 마스터 모티프가 되었으며, 게임 경험의 보편화와 경쟁사회에서의 피로, 대리만족 등이 그 배경으로 분석됩니다. [출처]


Ⅺ. 상태창은 사실 굉장히 급진적인 판타지입니다

왜 상태창이 그렇게 강력했을까요?

현실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내 가치가 정확히 얼마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고 있나?
성장했나?
회사에서 인정받을까?
내 재능이 어느 정도인가?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태창이 말합니다.

근력 72.
검술 A.
성장률 +13%.
경험치 83%.

갑자기 세계가 정직해집니다.

노력과 보상이 수치로 연결됩니다.

저는 한국 웹소설의 시스템을 단순한 게임 모방보다

‘측정 가능한 세계에 대한 판타지’

라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연구 역시 시스템 모티프를 단순 게임 UI 이상의 것으로 보고, 디지털 사회의 관계와 정체성 경험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장치로 분석합니다. [출처]


Ⅻ. 그리고 회귀가 붙습니다 —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완벽한 장치

상태창은 현재를 알려줍니다.
회귀는 미래를 알려줍니다.

둘을 합치면 거의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집니다.

어떤 기업이 뜨는지 압니다.
누가 스타가 되는지 압니다.
누가 배신하는지 압니다.
어디에 보물이 있는지 압니다.
어떤 기술이 중요해지는지 압니다.

이제 미래는 미지의 세계가 아닙니다.

공략집입니다.

한국의 회귀물 연구에서도 핵심 욕망을 상실의 회복, 미래 지식의 활용, 그리고 자기계발적 욕망과 연결해 분석해왔습니다. [출처]

여기서 일본 루프물과 한국 회귀물의 차이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일본 루프의 대표적 질문:
“나만 이 모든 실패를 기억한다면 어떻게 견딜 것인가?”

반면 한국 회귀물의 강한 문법은

“실패 이유를 다 아는데 이번에도 실패할 이유가 있는가?”

입니다.


ⅩⅢ. 그래서 한국에서는 세계 자체가 ‘공략 대상’이 됩니다

에바에서 세계는 공포였습니다.
나스에서 세계는 법칙이 있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게임소설에서 세계는 시스템이 됩니다.

한국 웹소설에서는 시스템에서 한 단계 더 갑니다.

세계는 최적화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던전을 공략합니다.
기업을 공략합니다.
주식시장을 공략합니다.
연예계를 공략합니다.
스포츠 리그를 공략합니다.
정치판을 공략합니다.
국가 운영까지 공략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인공의 역할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ⅩⅣ. 30년 동안 주인공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시대 대표적 인물 세계와의 관계 핵심 질문
1995 신지 세계에 당한다 왜 나는 이렇게 괴로운가
1996~2000 VN 플레이어 세계를 반복한다 다른 선택을 하면 구할 수 있는가
2000~04 시키·시로 세계의 법칙을 배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2000년대 중반 키ョン·아라라기 장르를 의식한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2002~11 리카·오카베·호무라 여러 세계를 기억한다 반복해도 구할 수 있는가
2009~ 게임형 주인공 시스템에 숙련된다 이 규칙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 회귀/현판 회귀자·헌터 시스템을 이용한다 어떻게 가장 잘할 것인가
직업·경영·재벌물 전문가·경영자 현실을 최적화한다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
『전독시』 이후 독자형 주인공 이야기 자체를 읽고 조작한다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무엇인가

이 표의 동사는 일부러 골랐습니다.

당한다 → 반복한다 → 배운다 → 의식한다 → 기억한다 → 숙련된다 → 이용한다 → 최적화한다.

이게 30년의 변화입니다.


ⅩⅤ. 그런데 독자도 동시에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에바에서 독자는 작품 밖의 해석자였습니다.
VN에서는 선택하는 플레이어가 됩니다.
나스 작품에서는 여러 루트를 보고 주인공보다 많은 것을 아는 존재가 됩니다.
『쓰르라미』에서는 다른 독자와 집단으로 추리합니다.
『우미네코』에서는 그런 독자의 태도 자체가 작품 안에서 심판받습니다.

『마도카』에서는 플레이어 역할을 호무라가 맡습니다.
『Re:제로』에서는 주인공이 직접 SAVE/LOAD를 합니다.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에 가면 아예

독자가 주인공이 됩니다.

최근 연구도 『전독시』의 핵심을 단순 게임 설정이 아니라, 김독자가 독자 → 등장인물 → 창조자로 순환하면서 독자·텍스트·작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메타서사로 분석합니다. [출처]

즉

처음에는 독자가 작품을 읽었습니다.
30년 뒤에는 작품이 ‘독자인 당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ⅩⅥ. 그리고 2026년: 서사의 적은 ‘불확실성’이 됩니다

여기서 현재 한국 웹소설까지 옵니다.

현대 웹소설에서 엄청나게 반복되는 장치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귀.
빙의.
환생.
상태창.
예지.
미래지식.
감정 읽기.
재능 판별.
작품 속 지식.
전생의 경험.

모두 무엇을 줄여줄까요?

불확실성입니다.

현실에서는

이 선택이 맞을까?

모릅니다.

웹소설 주인공은

압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웹소설의 가장 근본적인 판타지를

‘힘’보다 ‘확실성’

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ⅩⅦ. 그리고 플랫폼까지 그 문법을 강화합니다

이건 내용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웹소설은 특히 2013년 전후 회차별 유료결제 체계가 정착하면서 기존 장르소설과 다른 매체 환경을 형성했습니다. 연구에서도 유료결제 도입을 웹소설 장르가 독립적인 규범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봅니다. [출처]

그리고 2026년에 나온 최신 연구는 한국 플랫폼 웹소설의 특징을

회차별 유료결제 + 즉각적인 독자반응의 수치화 + 노출·연독률·매출의 연결

로 정리합니다. [출처]

이것은 작법 자체를 바꿉니다.

작가도 일종의 게임을 합니다.

오늘 화의 독자 유지율.
다음 화의 클릭.
구매전환.
랭킹.
댓글.
매출.

그래서 웹소설의 주인공만 숫자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도 숫자를 보고 연재합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동형관계입니다.


ⅩⅧ. 그래서 웹소설의 세계와 웹소설 산업이 서로 닮아갑니다

소설 속 주인공:

능력치가 올라갔다.
랭킹이 올라갔다.
돈을 벌었다.
다음 단계로 간다.

플랫폼의 작품:

조회수가 올라갔다.
연독률이 올라갔다.
순위가 올라갔다.
매출이 늘었다.

작가:

다음 화를 최적화한다.

즉 성장형 웹소설 자체가 성장형 플랫폼에서 생산됩니다.

이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서사 형식과 산업 형식이 서로 맞물린 겁니다.


ⅩⅨ. 그러면 에바와 현대 웹소설은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룹니다

이제 30년의 양 끝을 놓아보죠.

『에반게리온』

세계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불확실성이 공포입니다.

현대 한국 웹소설

내 능력치를 안다.
미래를 안다.
상대의 능력을 안다.
성공할 기술을 안다.
경제 흐름을 안다.
결과를 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쾌감입니다.

정확히 반대입니다.


ⅩⅩ. 그래서 한 시대의 대표적인 판타지가 바뀐 것입니다

1990년대의 판타지는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에 가까웠습니다.

2000년대 VN의 판타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고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나스는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도 내 선택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로 갑니다.

게임적 서사는

“세계에 명확한 규칙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 됩니다.

그리고 한국 웹소설은

“그 규칙을 알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해낼 텐데.”

에 도달합니다.

여기까지 이어집니다.


ⅩⅪ. 하지만 2020년대 후반에는 이 공식도 이미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회귀 자체는 더 이상 놀랍지 않습니다.
상태창도 놀랍지 않습니다.
천재 주인공도 놀랍지 않습니다.
미래지식도 놀랍지 않습니다.

그러니 경쟁축이 바뀝니다.

“성공하느냐”는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독자가 보고 싶은 것은

무엇으로 성공하는가?

가 됩니다.

검술 대신 투자.
마법 대신 기술개발.
던전 대신 시장.
길드 대신 기업.
파티 대신 인재영입.
영지 대신 국가.
전투 대신 협상·경영·프로젝트·산업.

그래서 성장의 단위가

개인 → 조직 → 기업 → 국가

로 확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입니다.


ⅩⅫ. 그리고 여기서 다시 ‘사람’이 중요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최적화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금방 지루해지기 때문입니다.

공략집이 완벽하면 긴장이 없습니다.
상태창이 모든 것을 말해주면 미스터리가 없습니다.
주인공이 늘 정답을 알면 세계가 죽습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은 다시 공략 불가능한 요소를 넣습니다.

사람.
관계.
우연.
욕망.
오해.
도덕.
뜻밖의 선택.

즉 30년 동안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들어온 장르가 결국 다시

“인간은 시스템이 아니다.”

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순환입니다.


그래서 이 30년사의 진짜 주제는 ‘게임화’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에바 → VN → 루프 → 게임소설 → 상태창 → 회귀

니까 게임화의 역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더 깊은 주제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의 역사입니다.

에바는 견디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VN은 반복해서 이해하려 합니다.
나스는 이해한 뒤 선택합니다.
용기사07은 다른 사람과 정보를 공유합니다.
호무라와 오카베는 반복을 혼자 기억합니다.
게임서사는 세계를 규칙으로 바꿉니다.
한국 웹소설은 규칙을 이용해 불확실성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결국 다시 발견합니다.

그래도 인간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저는 이 전체 계보를 이렇게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해석하는 인간에서 플레이하는 인간으로」

1995년의 인간은

세계 앞에서 “왜?”라고 묻습니다.

2004년의 인간은

“나는 무엇을 선택하지?”라고 묻습니다.

2010년대의 인간은

“규칙이 뭐지?”라고 묻습니다.

2020년대의 인간은

“그럼 어떻게 최적화하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제 좋은 이야기가 다시 묻기 시작하는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최적화해서 성공한 다음에는 무엇을 원하는가?”

여기에 다음 시대의 이야기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한 줄씩만 남긴다면

에반게리온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비주얼노벨

그렇다면 다시 선택해보자.

나스 키노코

다 이해했으면 이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라.

포스트 VN / 루프물

그 선택의 실패를 기억하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게임적 서사

세계에는 규칙이 있다.

한국 회귀·시스템 웹소설

규칙을 알고 다시 시작한다면 이번에는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은 아마,

“좋다. 이겼다. 그런데 그래서?”

일 겁니다.

저는 그 질문이 1995년 에바에서 시작해 30년 동안 한 바퀴 돌아온 오타쿠·장르서사의 다음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나는 왜 살아야 하지?’라고 물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이기는가?’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이긴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를 물을 차례가 된 셈입니다.

Posted by 모히토더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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